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1994 NBA 파이널|유잉 VS 올라주원]], 그리고 내리막길 ==== 1993-94 시즌, 조던이 3연패 이후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닉스에게 동부 컨퍼런스는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파죽지세로 달린 시즌 동안 유잉은 전년과 같이 맹활약하였고,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다. 2라운드에서 [[스카티 피펜]]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 7차전에 이르는 혈투를 펼친 끝에 승리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레지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와 7차전까지의 접전 끝에 승리한 유잉의 앞에 등장한 것은 바로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 로키츠였다. 대학시절 맞붙었던 사실과 현재의 경기들이 연일 매스컴에 비교 보도되는 떠들썩한 와중에 5차전까지 전적은 3승 2패로 닉스의 우위인 상태. 그러나 6차전에서 스탁스가 던진 슈팅이 올라주원에게 블록당했고, 연이은 7차전에서 스탁스가 1할대 야투율이라는 엽기적인 성공률을 보이는 상태에서 유잉은 패배하였으며 올라주원은 오래전 아픔을 설욕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마지막 경기인 7차전 패배의 직접적인 책임은 스탁스에게 있었지만, 6차전까지만 보면 스탁스는 유잉과 동등한 볼륨을 유잉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효율로 기록하며 공격에 한해서는 유잉의 부진 속에서도 시리즈가 7차전까지 이어지게 해준 공신이었다. 유잉의 경우 5차전을 제외하면 극도의 부진을 면치 못했는데, 시리즈 평균으로는 18.9점을 TS% 0.390으로 기록하며 26.9점 TS% 0.556을 기록한 올라주원에게 잡아먹히다시피 했다.[* 양팀 주전 10명 중 TS 40% 미만인 선수는 유잉 한 명 뿐이며, 7차전을 역대급으로 말아먹어 욕받이가 된 스탁스도 시리즈 ts%는 0.5정도는 간신히 넘었다.] 올라주원이 잘한 건 둘째치고 센터가, 그것도 유잉이라는 레전드 센터가 야투율도 아니고 ts%가 0.4를 넘기지 못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되게 부진했다는 말이 된다. 유잉은 점퍼 비중이 높은 선수치곤 야투율이 준수하고, 자삥도 잘해 이렇게까지 효율을 말아먹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도 시리즈 토탈 ts%에서 이런 충격적인 수치를 기록한 것. 물론 수비와 보드장악에 있어선 '''12.4리바운드 4.3블록'''을 기록하며 9.1-3.9를 기록한 올라주원 못지 않은 존재감을 보였으나[* 당시 기준으로 '''역대 파이널 최다 블록 기록(5차전 8개, 시리즈 전체 30개)'''을 세웠다.], 특기인 점퍼는 저주라도 걸린 것 마냥 빗나가며 죽을 쑤었기에에 어쩔 수 없었던 것. 이 부진의 이유를 분석해보면 닉스 팀을 떠나서 유잉 개인에게 휴스턴 로키츠란 팀은 별로 좋지 않았다. 유잉은 올라주원과 비교해 비교적 공격범위가 좁고 공격패턴이 단순했는데, 이 둘은 쌍방이 특급 수비력을 지닌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양 팀의 공격이 상당히 뻑뻑하게 돌아갔다.[* 실제로 양팀 중 하나라도 100점을 넘긴 경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상시 유잉의 점퍼는 주로 패스를 받아 넣는 방식이었는데, 휴스턴의 강한 팀 수비 때문에 좋은 패스를 받아 점퍼를 넣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1대1 공격을 많이 해야했다. 문제는 유잉이 1대1을 (S급 센터치고는)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그를 막는 수비수가 극강의 수비수인 올라주원이었다는 것. 역대 센터들 중에서도 1대1 기술의 다양성과 완성도는 그야말로 본좌급었던 올라주원과 달리, 유잉의 경우 1대1에서 주 공격루트가 페이더웨이 혹은 러닝 훅 등으로 올라주원만큼 다양하고 효율적인 옵션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잉의 점퍼는 4대 센터들 중에 가장 뛰어난 편이었지만 센터란 특성상 수비를 달고 쏘는 슛은 확률이 매우 낮았다. 때문에 결국 공격에선 답답한 모습만 보였던 것.[* 여담이지만 이듬해 휴스턴은 파워 포워드 오티스 쏘프를 트레이드하고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데려오는데, 드렉슬러의 존재로 확실한 2옵션을 얻었지만 대신 팀수비는 비교적 헐거워지게 된다. 94 시즌 로키츠는 NBA에서 팀 득점 전체 15위, 팀 실점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확실한 수비팀의 모습이었지만, 95 시즌엔 팀 득점은 전체 7위로 올라간 반면 팀 실점은 12위로 폭락하고 파이널에선 4경기 연속으로 [[올랜도 매직]]에게 100점 이상을 내준다. (반면 94시즌엔 닉스에겐 91점을 두번, 90점을 세번 내주고 나머지는 80점대/70점대 실점) 물론 올랜도 자체가 닉스보다 공격력이 훨씬 좋은 팀이긴 했지만 수비력 자체, 특히 쏘프의 부재로 골밑 수비력이 전년도보다 떨어졌던 것. 만약 닉스가 1995 파이널에 진출해 리벤지 매치를 벌였다면 적어도 유잉의 공격루트는 확실히 숨통이 트였을 것이고, 전체적으로 더 좋은 활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한 끗 차이로 놓쳐버리고 만 우승은 이후 그의 평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이 때 닉스와 유잉이 6,7차전 중 한 경기만 잡아 우승에 성공했다면 유잉은 4대 센터 중 가장 먼저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는 엄청난 프리미엄 덕택에 최소한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승은 로키츠와 올라주원의 차지였고, 다음 시즌까지 우승을 차지해 마이클 조던에 이은 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그 당시 4대 센터 서열에서 올라주원이 나머지 셋을 앞질러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에도 플레이오프에 나선 유잉과 닉스는 전년도의 설욕을 다짐하던 레지 밀러에게 MSG에서 맹폭격을 당하며 고배를 마시게 된다. 마지막 7차전 종료 직전 2점차에서 유잉이 날린 회심의 레이업슛이 림을 들어갔다가 나와버리는 불운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조차도 올라가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의 결과를 맞았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의 전성기를 함께한 팻 라일리도 떠나버리고,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유잉에게 이제 우승은 그야말로 선수 생활의 황혼을 장식해줄 마지막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1995-96 시즌 돌아온 조던, 새로이 영입된 [[데니스 로드맨]]과 더불어 최강팀으로 자리매김한 시카고 불스는 닉스를 가볍게 물리치며 희망을 또 다시 빼앗아 버렸다. 다음해 1996-97 시즌은 스승이었던 팻 라일리와 조지타운의 후배였던 [[알론조 모닝]]이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가,[* 당시 마이애미 히트와 뉴욕 닉스는 유잉과 모닝의 조지타운 선후배 맞대결, 라일리가 키워낸 두 팀이라는 점, 동일 디비전 소속이라는 다양한 측면에서 상당한 라이벌 의식이 들끓고 있었고, 이 해 시리즈에서는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결국 난투극으로 인해 닉스는 많은 선수가 징계로 출장할 수 없게 되면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다만 라이벌 관계와 별개로 모닝과 유잉은 절친한 사이였다. 실제로 유잉은 2000년 당시 모닝이 신장병을 진단받자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며 실제로 2003년에 적합판정 여부를 검사받았다. 그러나 모닝의 사촌이 이식에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실제 이식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게 엄청난 것이 유잉이 처음 신장을 기부해주겠다고 바로 2000년 9월이었는데, 이때 그는 '''현역'''이었다. 물론 두 시즌 후 은퇴했을 만큼 선수생활의 말년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시즌만 뛰어도 천만불 이상을 벌 수 있는데 커리어를 끝장날 수 도 있는 신장 기증을 흔쾌히 결심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은 이 다큐멘터리에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KpeD8eflT0 다만 여기에도 나와있지만 서로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절친이면서 코트 위에선 서로 죽일 기세로 경기했다고....] 그 다음해에는 닉스 킬러로 자리매김한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가 유잉의 희망을 앗아갔고, 마이클 조던이 또 다시 3연패를 이룩하는 사이에 어느 덧 유잉은 그저 그런 강팀의 그저 그런 에이스이자 일상과도 같은 부상에 시달리는 퇴물센터 정도로 폄하되며 선수 생활의 황혼에 접어들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